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두고두고 추억할 만한 좋은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추억은 잊히거나 때로 왜곡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각자의 소중한 보물입니다. 추억이 특별한 이유는 그 당시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지금 이 순간도 조금씩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되고, 떠올리면 행복해지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테지요. 그렇다면 왜 매 순간을 훨씬 더 소중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소개할 영화는 “오겡기데스까?(잘 지내시나요?)”라는 대사로 유명한 영화 <러브레터>입니다. 영화는 ‘후지이 이츠키’라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한 남자에 대한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진행됩니다. 이미 떠나고 없는 사람이기에 이야기는 과거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자와 잊고 지냈던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또 다른 여자는 그를 추억하는 일로 인하여 잊었던, 혹은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감정과 진실을 깨닫고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지요.
이야기는 ‘와타나베 히로코’라는 연인을 잃은 여성에게서 시작합니다. 히로코는 죽은 자신의 연인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하고 옛날에 그가 살았던 주소로 편지를 보내지요. ‘후지이 이츠키 씨, 잘 지내시나요? 전 잘 지냅니다’라고요. 놀랍게도 감기에 걸렸지만 잘 지낸다는 답장이 오고, 히로코는 그것이 천국에서 온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편지를 보낼 순 없겠죠. 그 주소는 동명이인인 ‘후지이 이츠키’라는 여성이 살고 있던 주소였습니다. 중학교 시절 남자 후지이 이츠키와 동창이었던 그녀는 우연히 잘못 전달된 편지를 통해 히로코와 연결되고, 그녀에게 그와 관련된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는지 확인하려고 직접 편지 속 주소까지 찾아간 히로코는 후지이 이츠키가 자신과 꼭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옛 연인이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여자 이츠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히로코는 연인이었던 이츠키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실 히로코의 기억 속 이츠키는 참 말이 없습니다. 첫 만남에서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나요?”라고 했던 말, 반지를 가져와 놓고도 세 시간 동안 말을 꺼내지 못해 오히려 히로코가 청혼해 “그래”라고 그가 했던 짤막한 대답. 이츠키에 대한 대단한 기억도 없지만 그녀는 그 짧은 기억에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옛 연인과의 행복한 기억에 머무르고자 하지요. 표정에서 드러나는 슬픔과 공허함, 머뭇거리는 행동 등에서 그녀가 아직 그를 잊지 못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고 미래를 그리려는 아키바를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반면 이츠키를 기억하는 또 다른 여자 이츠키는 정반대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그녀에게서는 부재와 죽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요. 그녀는 병으로 아버지를 잃고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살아가지만 언제나 밝고 명랑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히로코가 가진 결핍이 점차 여자 이츠키에게로 전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 이츠키가 과거의 기억에서 숨겨진 진심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나요?” 남자 이츠키가 히로코에게 했다던 이 말은 사실 여자 이츠키를 향한 말입니다. 하지만 남자 이츠키의 말은 너무 늦고 말았지요. 여자 이츠키의 추억 속에서 그는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거나 읽지도 않는 책을 잔뜩 빌려 가거나, 다친 다리로 달리기를 하다가 쓰러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빗나간 사랑은 그 자체로 결핍을 만듭니다. 서툰 소년의 몸짓은 여자 이츠키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잔잔하게 남은 기억을 떠올려 편지에 쓸 때, 우리는 모두 그것이 빗나간 사랑의 언어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틀림없이 당신을 좋아했을 거라는 히로코의 편지에도 이츠키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후배들이 찾아와 내민 책 한 권은 그녀의 파편화된 추억을 하나로 이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남자 이츠키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반납을 부탁했던 책이었는데요. 후배들은 책의 도서카드를 꺼내보라고 합니다.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이 쓰인 도서카드의 뒤편에는 여자 이츠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끝내 말로는 설명하지 못했던 사랑의 언어를 보고, 여자 이츠키도 그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사실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자의 마음뿐 아니라 그 시절, 자신 역시 이츠키를 좋아했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부친상으로 일주일 늦게 등교한 학교에서 남자 이츠키가 전학 갔다는 말을 듣고 책상 위에 놓인 꽃병을 깨어버리기도 했으니까요.
히로코도, 두 명의 이츠키도 모두 대상과 언어가 부재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 버린 것이기에 사랑은 잔인할 만큼 슬픈 불가능성을 지녔습니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여자 이츠키에게 도착한 ‘러브레터’는 아프고도 설레는 부재와 결핍이지요. 주인공들 말고도 영화 속에는 유난히 추억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낡은 집을 떠나려 하지 않는 이츠키의 할아버지도, 죽은 남자 이츠키에게 아직도 같은 노래를 부르냐고 묻는 아키바도, 죽은 남편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 이츠키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들 이처럼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지나간 날들에 대한 그리움, 다시 보지 못할 이에 대한 아쉬움이 늘 마음을 슬프게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기에 추억은 더욱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 오늘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분명해지는 것이지요. 지금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 오늘 물을 주지 않으면 내일 죽을지 모르는 꽃에게 물을 주는 것 말입니다. 내일이면 당신은 없을지도 모르기에 오늘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마음속에 오래 담아둔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는 일입니다.